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바르 대제 (문단 편집) ===== 외교 관계 ===== 악바르의 재위기간인 1500년대 후반에는 [[포르투갈]]이 막 인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처음으로 무굴 제국과 포르투갈이 접선한 시점은 악바르가 구자라트를 손에 넣은 1572년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구자라트에 항해 기지를 짓고 점차 인도와의 교역을 트고 있었는데 구자라트를 무굴 제국이 집어삼키면서 포르투갈과 무굴 제국의 접촉이 자연스레 일어나게 된 것. 포르투갈인들의 소식을 전해들은 악바르는 이들을 제국의 잠재적인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포르투갈인들이 [[페르시아 만]]을 따라 항해하는 것을 금했고 끝까지 포르투갈인들을 경계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양]]에서의 해상 패권을 바랐지만 매년 인도양을 통해 [[메카]]로 성지순례를 보내야했던 무굴 제국은 도저히 양립하기가 힘들었던 것도 이유가 컸다.[* 악바르는 포르투갈인들로부터 함포와 군함을 수입해 구자라트에 해군을 창설하고자 했지만 무굴 제국의 해상 진출을 두려워한 포르투갈인들을 당연히 거절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적대한 것은 아니었고, [[예수회]] [[선교사]]들을 초청해 [[신약성경]]의 내용을 경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도에 자리잡은 무굴 제국과 저 멀리 [[아나톨리아]]에 있는 [[오스만 제국]]은 일반적이라면 크게 만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이슬람의 최대 성지이자 필수적인 순례지였던 [[메카]]와 [[아라비아 반도]]가 오스만 제국의 땅이었기 때문에 무굴 제국은 싫으나 좋으나 오스만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악바르의 재위기는 오스만 제국 최고의 전성기인 [[쉴레이만 대제]]의 치세와 겹쳤기 때문에 오스만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악바르는 수 차례 오스만 술탄에게 선물과 값비싼 보물들을 보내는 등 오스만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썼고, 메카에는 직접 사신단을 파견하여 4년 동안 머무르게 했다. 이 사신단들은 4년 동안 메카에 머무르며 순례를 온 가난한 인도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과 포르투갈 간의 갈등이 일어나자 무굴 제국은 오스만의 편을 들어 포르투갈과의 일시적 동맹 관계를 청산했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는 관계가 애매해졌다. 원래 사파비 왕조는 [[후마윤]]에게 군대를 지원해주는 등 전통적인 동맹 관계였지만 무굴 제국이 급성장하면서 관계 재정립에 들어가며 애매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특히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은 둘다 똑같은 [[수니파]]였기 때문에 같은 입장이었던 반면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였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이질적인 입장이었다. 특히 악바르가 사파비 왕조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칸다하르]] 지방을 먹어버린 탓에 사파비 왕조와의 관계는 예전같지 못했고, 칸다하르 합병 직후에는 거의 10년 넘게 양국 간 외교관계가 단절되기까지 했다. 다만 샤 아바스가 새로운 사파비 황제로 즉위하면서 1587년에 외교 관계가 복구되었지만 무굴 제국과 관계가 이전처럼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적대하고 지낸 것도 아니라서 황제들 간에 선물이나 친서를 주고받으며 기본적인 관계는 유지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